마피아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탈세’ - ㊷라스베이거스 40년 장악한 ‘마피아’
마피아는 1947년부터 라스베이거스에 발을 들인 뒤 카지노를 통해 ‘현금장사’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금주법이 폐기된 이후 마피아는 ‘현금 장사’인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든든한 ‘돈줄’로 인식하고 이때부터 라스베이거스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마피아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매출을 축소시켜 거액의 차액을 빼돌리는 수법으로 돈방석에 앉게 된다.
<마피아는 카지노에서 매출금액이 집계되기 전에 현금을 빼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업 이었다. 속칭 ‘스키밍’이다. 1950년대 마피아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거둬가는 돈은 하루에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도 라스베이거스 사하라호텔 카지노, 리비에라 호텔 카지노, 프레몬트 호텔 카지노, 하시엔다 호텔 카지노, 스타더스트 호텔 카지노는 모두 마피아의 입김에 있었다.
1973년 오일쇼크가 오기 전까지 이 시기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마피아의 최고 전성기였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마피아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스키밍’을 통해 40년 동안 거액의 자금을 빼돌리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각종 범죄의 발생을 차단하고, 현대식 도박도시로 발전하는데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마피아는 라스베이거스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는 지적이다.
벅시 시걸이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하면서 마피아 자본의 물꼬를 텄다면, 현대적인 ‘테마 리조트’를 개척한 인물은 도박사 겸 모텔 체인의 CEO였던 ‘제이 리노’를 꼽는다. 그도 역시 마피아의 조직원이었다.
그는 1960년대 초 라스베이거스의 플라밍고와 샌즈 등에서 카지노 게임을 즐겼지만 시설과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통이 큰 그는 마피아의 돈줄 역할을 하는 팀스터 노동조합 연금기금을 끌어들여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테마 호텔인 로마시대 황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저스 팰리스’를 만들었다.
호텔 문을 들어서면 마치 자신이 황제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은 ‘카이사르의 궁전’을 모티브로 하여 1966년 8월 5일 개장하였다.
당시 시저스 팰리스 투자금액은 라스베이거스 사상 최대 규모인 2500만 달러였다. 680개 객실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관광객들은 궁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열광했다.
라스베이거스 자료에 따르면 시저스 팰리스는 호텔과 카지노 예약금액이 첫 주에만 4200만 달러를 올려 라스베이거스 매출기록을 갱신했다.
이 때문에 시저스 팰리스는 수년간 라스베이거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기는 카지노로 명성을 이어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는 건전한 성인들의 게임장이라는 분위기가 짙다
특히 시저스 팰리스 호텔은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레인 맨’(1989년 5월 개봉)의 촬영지로 알려져 더욱 유명세를 탔다.
한편 1951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살인과 강도, 절도 등 카지노 도시에서 자주 발생하던 강력범죄가 자취를 감춘 것은 마피아의 활동 때문에 가능했다.
1951년 8월 라스베이거스 플라밍고 호텔 카지노에서 현금 3500달러를 훔쳐가는 도난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도난사건으로 없어진 금액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LA마피아는 도난사건에 일대 경종을 울릴 필요성을 느꼈다. 카지노 주변에 강도와 절도 및 살인사건 등 강력범죄가 발생되지 않아야 돈 많은 관광객들이 라스베이거스를 안심하고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각 LA마피아는 절도범 2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마피아 조직원에 의해 붙잡힌 두 절도범은 바로 처형되었다.
<마샬 카이파노(마피아 보스)가 1951년 8월부터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호텔과 카지노의 호객행위에 악영향을 끼치는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절대 금지된다. 마샬 카이파노의 말이 곧 라스베이거스의 법률이었다. 1953년 LA마피아가 경영하던 라스베이거스 호스슈 카지노를 갈취하려던 라스베이거스 갱단 루이스 스트라우스를 살해한 것도 LA마피아의 전문 청부업자의 작품이었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1940년대 중반부터 라스베이거스를 장악한 마피아가 안정적으로 범죄자금을 끌어들이자 1970년대 중반부터 FBI가 라스베이거스 마피아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마피아는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동양의 불문율을 우습게 알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대표하는 카쇼 공연
<미국 FBI는 1978년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수사 중이었다. 마피아 쪽에 혐의를 두고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들이 자주 모이는 빌라 카프리 피자가게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그래 6월 문제의 피자집에서 칼 시벨라와 칼 델루나 등은 밀워키 마피아, 시카고 아우트피트와 함께 사업하고 있는 라스베이거스 트로피카나 호텔 카지노, 스타더스트 호텔 카지노에 대해 대화 중이었다. 알렌 글릭과 팀스터 연금기금도 언급되었다.
이 대화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마피아가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잇다는 첫 번째의 공식 증거가 된다. FBI는 수사를 개시하며, 스트로맨 작전이라고 명명한다. ‘스트로맨’이란 허수아비를 뜻한다. 즉, 카지노의 서류상 사장들이 모두 허수아비, ‘바지사장’이라는 뜻이다.
영장을 발부 받은 FBI는 1979년 2월 카 델루나의 집을 급습하여 엄청난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카지노에서 빼돌린 현금 8만 달러와 함께 발견된 칼 델루나의 메모장이 그것이다. 원래 마피아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불법 사업에 대해 절대로 메모를 하지 않고, 오직 기억력에 의존해 사업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칼 델루나는 그동안의 스키밍 사업에 대해 들어온 돈, 나간 돈 모두를 빠짐없이 날짜와 함께 모두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마피아에겐 치명적인 증거였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당시 FBI는 스키밍을 주도한 마피아 보스들을 대거 검찰에 송치했고 재판을 통해 중형을 선고받도록 했다.
카 델루나는 30년 형, 찰스 모레티나는 20년 형, 칼 시벨라는 3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FBI는 라스베이거스 마피아들의 스키밍 사건을 수사하면서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여러 차례 확인을 거쳐 마침내 결단을 내린 FBI 수사진이 1982년 1월, 필폰토와 조셉 탈레리코가 만나는 순간을 기습 체포의 시간으로 잡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주고받은 가방에는 돈다발이 들어 있지 않았다. 가방에는 와인과 쿠키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FBI 수사관들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이런 일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의심했으나 이미 벌어진 뒤였다. 같은 방식으로는 증거를 잡기 어렵게 됐음을 안 FBI는 접근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카지노에서는 손님이 현금을 내고 베팅에 사용하는 칩으로 교환할 때마다 그 액수를 적은 ‘슬립’을 발행한다. 슬립에는 카지노 매니저의 사인이 들어간다. 이 때 들어온 현금보다 적은 액수가 적힌 슬립을 수사팀이 발견한 것이다.
수사관들이 수천, 수만 장의 슬립을 모두 확인한 결과 위조된 슬립을 다수 발견했고, 카지노 직원의 필적을 입수해 대조한 결과 위조된 사인은 모두 한 사람의 것으로 나타났다. 카지노 매니저의 한 사람인 루 살레르노였다. 이렇게 해서 수사팀은 증거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현금 수입이 집계되기 전에 돈이 빼돌려지는 것으로 확신했던 FBI 수사진은 마침내 확실한 물증을 캐내, 공모자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리는데 성공했다. 1978년 시작된 수사가 실로 8년 만인 198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막을 내렸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
FBI의 치밀하고도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재판이 시작된 1981년에서 1986년까지 스트로맨 사건은 재판이 완결되고 마피아 피고인들에게는 중형이 선고되는 바람에 마피아의 영향력에서 라스베이거스는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수사당국은 파악했다.
이후 라스베이거스는 단순 카지노 도시에서 현재와 같은 가족형 관광 컨벤션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