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카지노기업 ‘파라다이스’ 출범 - ⑨‘카지노 신화’를 창조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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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카지노기업 ‘파라다이스’ 출범 - ⑨‘카지노 신화’를 창조한 ‘전설’

매니저 기자 0 790 0 0

인천 오림포스와 서울 워커힐호텔 카지노가 성공적으로 개장한 뒤 전락원 회장은 외연확장에 나섰다.

국내 최초 카지노 기업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전 회장은 1972년 7월 27일 ‘파라다이스 투자개발’을 창업하였다. 이는 파라다이스 그룹의 출발이다.

사무실은 서울 중구 태평로 센터빌딩 16층에 마련하고 글로벌 기업의 토대를 준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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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워커힐 카지노 로고 


당시 파라다이스 투자개발의 사업목적은 관광토산품 판매업, 경비업 및 축산업, 납품업 등 관광관련 업종으로 한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라다이스 투자개발은 부산의 해운대관광호텔에서 카지노 운영요청을 받았는데 ‘카지노 선각자’에게 이러한 호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또 파라다이스 투자개발은 ‘삼다도의 섬’ 제주도에도 상륙하게 된다. 전 회장은 워커힐 카지노 성공개장 이후 제주지역 최초의 관광호텔인 서귀포호텔 카지노 개장 지원으로 이미 인연을 맺은 상태였다.

전 회장에 의해 카지노 영업을 하게 된 제주도 서귀포호텔은 당시 경영악화로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자 재일교포인 김평진 대표가 전 회장에게 호텔인수를 제안했다.

당시 서귀포호텔에 이어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호텔과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허니문하우스 등도 인수를 요청할 정도로 전 회장은 호텔업계에서도 최고의 경영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전 회장은 서귀포호텔, 제주호텔, 허니문하우스 등 제주지역 호텔 3곳을 인수했다.

한편 잘 나가던 워커힐호텔과 카지노는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당시 정부는 관광산업을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인식하고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진행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관광공사의 호텔 매각을 지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광공사의 호텔사업은 ‘외화내빈’으로 서울 요지에 위치한 워커힐, 반도호텔, 영빈관 모두가 적자에 허덕였기 때문에 민간매각은 당연지사였다.

서울 반도호텔은 롯데그룹이 인수하고, 영빈관은 삼성그룹에 매각절차를 진행했다. 특히 워커힐호텔은 선경이 차지하면서 정계와 재계에서는 특혜성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많았다.

당시 최종건 선경그룹 회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과 사돈관계인 탓에 선경그룹 계열의 선경개발에서 황금알을 낳는 워커힐호텔과 카지노를 인수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 이유다.

이후락 부장의 5남 이동욱씨는 최종건 회장의 4녀인 최예정씨와 혼인했다.

워커힐은 국내 최초의 극장식 쇼와 현대적인 나이트클럽으로 유명했고, 수시로 패션쇼를 열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실내 수영장을 갖춘 국내 최고의 호텔 이었다.

1973년 3월 6일 워커힐이 민영화 됐지만 선경개발은 카지노에 문외한 이었다. 워커힐 카지노 운영은 자연스럽게 파라다이스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인천 오림포스호텔 CEO인 유화열씨는 워커힐호텔과 카지노 매입에 나섰다가 ‘파워 게임’에 밀리면서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재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워커힐을 인수하려고 했다.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워커힐은 네가 해봐라’하고 권유하기에 인수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청와대의 관광담당 비서관이 나보다 이틀 앞서 선경의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실패했다.

워커힐이 선경에 넘어간 뒤 카지노 운영권 문제로 2개월간 (선경과)싸움을 벌였다. 선경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부탁을 하고 나도 이 부장에게 (워커힐 카지노 운영권 문제를)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부장은 인천 오림포스에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방문하면서 친한 사이였다.

중간에서 골치가 아픈 이 부장은 ‘당신들끼리 합의하라’고 손을 뗐다. 얼마 뒤 내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최종현 선경회장이 찾아와 ‘전락원씨와 지분을 반반씩 나누어 주십시오’하기에 더 이상 싸우기가 싫어 받아 들였다.

그 후 1년 반쯤 뒤에 다시 (워커힐 카지노)지분조정 얘기가 나오기에 ‘셋이 달라붙어 하느니 나는 빠지겠다’하면서 손을 뺐다. 당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월간조선 1993년 7월호 ‘유화열 독점 인터뷰’ 기사에서>

당시 ‘카지노 선각자’로 알려진 전락원 회장에게 선경그룹은 카지노 경영을 파라다이스에 위탁하면서 총수익의 일정 부분을 주기로 약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카지노 경영권을 차지하는 것도 공짜가 아니어서 전 회장은 당시 상당한 거액을 선경에 주고 카지노 경영권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파라다이스는 자금난으로 창간 3년에 불과한 정기간행물 ‘동서문화’(전락원 회장에 의해 1970년 9월 창간) 발행을 중단해야 했다.

<‘동서문화’는 발간 3년째를 맞이한 1973년 12월, 1974년 신년호를 발행한 뒤 애석하게도 잠정적인 휴간에 들어갔다. 파라다이스 투자계획이 워커힐호텔 카지노의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자금수요가 많아 예산을 끌어올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파라다이스그룹 30년사에서>

그러나 일반에는 선경이 워커힐호텔을 인수하고 워커힐 카지노는 전락원 회장이 인수한 것처럼 알려졌으나 실제 워커힐 카지노 소유권도 선경에서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진실은 전락원 회장과 선경 고위층만 알았던 극비 사항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언론인출신의 한 인사는 “선경그룹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워커힐 카지노를 인수했지만 카지노 경영은 전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내 카지노 업계의 선각자로 알려진 전락원 회장과 카지노 수익의 일정 부분을 나누기로 하고 경영을 맡겼다. 물론 회계와 일반적인 경영은 선경에서 맡았지만 카지노 총괄 경영과 관리는 전락원 회장이 맡았다.”고 말했다.

파라다이스는 ‘파라다이스그룹 30년사’에서 워커힐호텔 카지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73년 3월 6일자로 워커힐호텔이 선경개발에 매각되었다. 선경개발의 워커힐호텔 인수에 따라 파라다이스 그룹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선경개발이 카지노 허가권자로서 워커힐호텔 경영정상화를 위해 카지노 경영권을 파라다이스 투자개발 전락원 회장에게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전락원 회장이 우리나라에 카지노사업을 도입, 정착시킨 장본인이고, 그동안 보여준 경영수완을 고려하면 선경개발 워커힐호텔의 결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콘티넨탈관광은 내부적으로 경영권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되었고 김성진 대표이사 체제로 새롭게 개편되었다.

전락원 회장은 워커힐 카지노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하고 콘티넨탈관광의 김성진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 이사들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벤치마킹을 보냈다. 이들은 빠듯한 일정이지만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영업, 게임시설, 서비스 등을 섭력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임종류가 다양하지 못하고 시설도 전근대적인 워커힐 카지노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콘티넨탈경영진은 시설을 대폭 보강하기로 하고 자본금을 3000만 원으로 증자하였다.

1973년 10월 워커힐호텔이 신축공사에 착수함에 따라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지상 1층에서 다시 2층으로 장소를 옮겨 운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카지노 영업장을 확장하고 인원도 속속 보강했다.

1968년 최초 개관당시 4종 12대이던 게임기가 1973년 9월까지 5종 28대(룰렛 4, 블랙잭 18, 다이스 2, 포카 2, 바카라 2대)로 두배 가량 증설되었다.

1975년에는 워커힐 카지노 운영요원이 4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978년에 이르러서는 워커힐호텔의 신관 신축개관에 따라 영업장의 면적을 600여 평 규모로 확장했다.

카지노 운영요원도 500여 명으로 증원하였고 게임기는 1977년 10월 7종 49대(룰렛 8, 블랙잭 28, 다이스 2, 다이사이 2, 포커 2, 바카라 6, 키노 1대)로 대폭 증설했다.

한편 1975년에 오림포스호텔 유화열 회장의 경영권 지분을 완전 청산함으로써 워커힐 카지노는 파라다이스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그룹 전반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파라다이스 30년사에서>

한편 1973년 파라다이스그룹의 아프리카 케냐 진출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민영화된 워커힐 카지노의 경영내실화를 한창 진행하던 1973년 초 전 회장은 케냐관광공사(KTC)로부터 케냐 진출을 요청받았다.

당시는 대한민국이 케냐와 외교관계도 수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케냐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고 투자를 위한 외화반출 마저도 어려운 시기였다.

케냐 프로젝트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켄야타 대통령 별장인 ‘워터 프론트 롯지’를 파라다이스그룹이 맡아서 운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케냐관광공사가 대통령별장을 운영했으나 누적되는 적자를 견딜 수 없어 적임자를 찾다가 말레이시아 겐팅 하이랜드를 성공시킨 명성을 전해 듣고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현장조사를 거쳐 케냐 진출을 확정한 전 회장은 이듬해 3월 케냐 현지에 별도 법인을 설립해 대통령 별장 운영에 나섰다. 또 케냐 정부로부터 카지노 사업권을 허가받은 뒤엔 케냐 사파리파크호텔도 인수하게 된다.

전 회장이 인수한 사파리파크호텔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유럽풍 호텔로 단장하자 아프리카 최고 수준의 호텔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파리파크호텔에도 카지노를 개설했음은 물론이다.

사파리파크호텔로 인해 명품호텔을 갖게 된 케냐는 전락원 회장에게 국빈대접을 했고 나중에 파라다이스그룹에 주한 케냐 명예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전 회장을 명예총영사로 위촉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전 회장은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전에서 케냐의 IOC위원을 통해 아프리카 다른 나라의 수많은 IOC위원을 설득해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데 크게 기여한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북한이 케냐와 수교하면서 북한대사관을 설치하려하자 전 회장은 케냐 대통령을 만나 “만약 케냐 정부가 북한대사관 설치를 허용하면 곧장 케냐에서 철수 하겠다”고 통보해 북한 대사관의 설치를 막은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다.

조영행 전 주 칠레대사는 전락원 추모집 ‘드높은 이상향을 꿈꾼 도요새’에서 케냐 사파리파크호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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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한시 파라다이스 비치호텔을 방문한 모이대 케냐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는 전락원 회장 


<“내가 전락원 회장을 만난 것은 1991년 11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있는 사파리파크호텔에서였다. 당시 나는 주 나이지리아 대사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며칠간 사파리파크호텔에 투숙하면서 느낀 나의 인상은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 호텔이 한국인이 투자해서 건설한 호텔인가? 열대 식물원 속에 있는 재벌의 별장을 연상케 한다. 누구라도 아프리카를 느낄 수 있고, 아프리카를 숨 쉴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파리파크호텔은 서구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이라서 이곳에 투숙하기 위해서는 1년 전, 또는 적어도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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