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미국의 도시’에서 ‘세계인의 도시’로 - ⑬‘카지노 신화’를 창조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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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미국의 도시’에서 ‘세계인의 도시’로 - ⑬‘카지노 신화’를 창조한 전설

매니저 기자 0 554 0 0

벅시 시걸이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하면서 마피아 자본의 물꼬를 텄다면, 현대적인 ‘테마 리조트’를 개척한 인물로는 도박사 겸 모텔 체인의 CEO였던 ‘제이 사노’를 꼽는다.

그는 1960년대 초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하면서 플라밍고와 샌즈 등에서 카지노 게임을 즐겼지만 이용하는 시설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마피아의 후원을 받고 있던 노동조합 연금기금을 끌어들여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테마 호텔을 구상했고, 로마시대의 황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저스 팰리스’를 탄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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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파라오를 테마로 만든 룩소 호텔 입구 스핑크스. 조각상 


호텔 문을 열면 마치 황제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은 ‘카이사르의 궁전’을 모티브로 하여 1966년 8월 5일 개장했다.

당시 시저스 팰리스 투자금액은 라스베이거스 사상 최대 규모인 2500만 달러였다. 680개 객실은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으며 사람들은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 열광했다.

특히 그는 독특한 개장 이벤트를 위해 1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했다. 이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호텔카지노 개장이벤트를 개척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가장 화려하고 멋진 개장 축하연을 위해 개장식에 참석한 고객들에게 안심 스테이크 2000킬로그램, 샴페인 5000잔, 우크라이나 캐비어 까지도 무료로 제공했다.

라스베이거스 자료에 따르면 시저스 팰리스는 개장 이벤트에 거금을 쏟아 넣었지만, 호텔과 카지노 예약금액이 첫 주에만 4200만 달러를 달성해 라스베이거스 도박기록을 갱신했다.

이 때문에 시저스 팰리스는 수년간 라스베이거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긴 카지노로 등극할 수 있었다.

시저스 팰리스 호텔은 프로복서 김득구 선수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곳이다. 1982년 11월 13일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WBA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도전한 김득구 선수는 맨시니의 강펀치를 맞고 쓰러진 뒤 4일 만에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시저스 팰리스 호텔은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레인 맨’(1989년 5월 개봉)의 촬영지로 알려진 뒤 더욱 유명세를 탔다.

미라지 리조트의 부회장 앨런 펠드먼은 시저스 팰리스를 만든 ‘제이 사노’에게 사람들이 라스베이거스에 오는 것은 도박이 아니라 ‘환상’을 찾기 위해 온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건 도박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환상을 쫓았던 거예요. 그는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으로 부터 도피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에 온다는 것, 그래서 라스베이거스에 푹 빠지길 원한다는 것을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어요.

사노는 세상의 대다수가 로마시대 황제인 시저처럼 살 수 있다면 시저처럼 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생각의 혁신 라스베이거스에 답이 있다’ 에서>

제이 사노는 자신에게 대박을 안겨 준 시저스 팰리스를 개장 3년 만에 6000만 달러를 받고 팔아 치웠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활기차고 가장 세련된 서커스에 둘러싸인 카지노호텔 ‘서커스서커스’를 만들었다. 


이처럼 사노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가장 기발한 컨셉트와 아이디어를 통해 라스베이거스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사노는 6000개의 객실을 자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런 호텔리조트를 짓기 위해 10억 달러를 투자할 투자자를 물색했다. 타워 한쪽 끝을 테라스로 만들고, 위에서 부터 각 층을 흘러내리는 인공폭포를 계획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지노 내부에 롤러코스터를 만들 생각도 하고 있었다. ‘생각의 혁신 라스베이거스에 답이 있다’에서>

도박사로 살아온 사노는 그러나 천문학적인 돈을 카지노에서 벌어들였지만 카지노를 개장한 이후에는 평상심을 잃은 탓인지 그가 모은 재산 가운데 2500만 달러를 도박으로 날린 것으로 그의 아들은 추산했다.

시저스 팰리스에 이어 서커스서커스 카지노호텔로 라스베이거스에 최초의 테마 리조트 역사를 쓴 사노는 1984년 거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1966년 8월 제이 사노가 시저스 팰리스를 개장하던 그해 ‘20세기 최초 억만장자’, ‘영화제작자’, ‘비행사’ 등의 수식어를 가진 하워드 슈즈가 라스베이거스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신비에 쌓인 ‘은둔의 억만장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18세에 바위를 정교하게 자르는 드릴을 생산하던 휴즈 공구회사의 상속자가 된 이후 평생을 돈방석에서 살았다. 193센티미터의 큰 키에 미남이기도 한 그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남자로도 알려졌다.

그는 억만장자라는 타이틀에 잘 생긴 외모를 바탕으로 캐서린 햅번, 진 할로, 에바 가드너, 제인 러셀, 올리비아 하빌랜드, 수전 헤이워드, 진저 로저스 등 헐리우드 톱스타들과의 염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뛰어난 비행사이기도 한 그는 두 번의 큰 비행사고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하늘을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사랑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고, 헐리우드에서는 영화제작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66년 추수감사절 기간인 11월 27일, 그는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였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것도 기행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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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 3대 쇼의 하나인 윈 호텔의 로레브 쇼 


휴즈의 전기 작가인 ‘마이클 드로스난’에 의하면 17년 동안 연방정부에 소득세를 단 한 푼도 납부하지 않았던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과도한 세금과 벌금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캘리포니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저택과 특급호텔을 버리고 바하마, 지중해, 영국, 라스베이거스 가운데 한 곳을 도피처로 삼기 위해 수백 명에 달하는 수행원들과 여행을 떠났다. 도피처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던 셈이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휴즈는 크리스마스 성수기 전까지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호텔로 알려진 ‘데저트 인’호텔의 2개 층 전체를 빌려 숙소로 사용했다.

그런데 휴즈는 크리스마스 성수기가 다가오자 카지노 VIP들의 숙소로 제공해야 할 귀빈용 호텔 객실들을 몽땅 사용하면서도 카지노에는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또한 데저트 인 호텔을 떠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참다못한 데저트 인의 CEO(모리스 댈리츠)는 “우리는 크리스마스 성수기에 두 층의 방을 모두 VIP고객들에게 예약했으니 방을 비워 달라”고 퇴실을 요구했다.

이 말을 비서로 부터 전해들은 휴즈는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는 당시 데저트 인 호텔 시가의 2배에 달하는 1320만 달러를 내고는 호텔을 통째로 사는 ‘호텔쇼핑’을 감행했다.

이어 휴즈는 곧장 라스베이거스의 영구 거주민으로 등록 하였다.

휴즈에게 퇴실을 요구했던 데저트 인의 CEO 댈리츠는 유태인 출신에 마피아와 연관된 핵심 인물로 알려졌으나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한 카지노 사업가로 소문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데저트 인 호텔의 CEO로 알려진 댈리츠는 라스베이거스에 종합병원과 컨벤션센터, 라스베이거스 컨트리클럽을 지어 기부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이런 선행으로 그는 1976년 라스베이거스 시민의 상, 1982년에는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는 시민단체로 부터 ‘자유의 불꽃 상’을 받았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데저트 인 호텔을 사들인 휴즈는 1년 동안 샌즈, 캐스트어웨이, 뉴 프런티어, 랜드마크 등 라스베이거스 소재 6개의 호텔을 추가로 매입했다. 


영화광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지역 TV방송국 두 곳을 360만 달러에 인수하는 기행을 보였다.

이후 휴즈는 라스베이거스에 오지 못하는 수억 명의 전 세계 도박사들을 도박에 끌어들이기 위한 마권영업도 계획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짜릿한 베팅을 즐기기 때문에 마권영업을 통해 카지노장이나 경마장에 가지 않고도 전화로 베팅을 할 수 있는 마권영업을 하면 큰돈을 벌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 사업을 비서진에게 지시했으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그의 비서들이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해 사업은 추진되지 못했고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특히 휴즈는 라스베이거스를 새롭게 변화시킬 원대한 꿈을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카지노호텔(4000객실)을 만들고 호화로운 국제공항을 건설해 시에 고가로 매각하는 것이 그 첫 째였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최소 3, 4개의 카지노호텔을 추가로 매입하고 리노와 레이크 타호에 있는 해러스 카지노 인수도 추진했다.

이외에도 당시 그는 네바다 주 광산 수십 곳에 2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다.

새로운 의과대학을 라스베이거스에 건립하고 네바다의 미래를 계획하는 재단에 거액의 기금지원도 약속했다. 또 네바다의 주립전문대학 건립에도 거액을 기부했다.

네바다 주에 정착한 휴즈는 애향심을 가지고 라스베이거스의 발전을 위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지역사업에 큰돈을 쾌척하거나 기부를 약속한 사례는 전무후무 했다.

이처럼 휴즈는 ‘미국의 도시’에 머물던 라스베이거스를 ‘세계의 도시’로 만드는 거대한 꿈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휴즈는 미국정부가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보다 100배나 더 강력한 수소폭탄 실험 소식을 신문보도를 통해 접하고 혼란에 빠졌다. 이 때문에 그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결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4년 전 그랬던 것처럼 1970년 추수감사절에 라스베이거스를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 


이렇게 라스베이거스를 떠난 억만장자 휴즈는 바하마의 브리타니아 비치호텔, 니카라과 인터콘티넨탈 마나구아로 등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멕시코 아카폴카 프린세스 호텔의 펜트하우스였다.

멕시코의 마지막 여행지에서 1976년 4월 초, 조용히 눈을 감은 그의 시신은 4월 5일 휴스턴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이틀 뒤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가 남긴 유산은 20억 달러(2조 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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