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 ㊾김형욱 전 중정부장과 카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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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 ㊾김형욱 전 중정부장과 카지노

매니저 기자 0 488 0 0

김형욱 회고록을 집필한 김경재 전 의원은 1977년~1979년 9월까지 미국에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을 가장 자주 접촉한 인물이다.

그런 김경재 전 의원이 김형욱 회고록 5권인 ‘혁명과 우상’에서 김형욱 실종과 살해에 대해 예리하면서도 특별한 내용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혁명과 우상’에서 한국인 킬러를 고용한 살해수법 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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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전 의원이 집필한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오전 벤윅 익스프레스를 쏜살같이 빠져나와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바로 파리행 콩코드 여객기에 탑승했다. 좌석은 2등 프레스티지석이었다.

프랑스는 5시간 비행거리지만 미국 동부보다 대여섯 시간 앞서가기 때문에 그가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 45분이었다. 이상열 공사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부장님, 어서 오십시오.”
“잘 있었소, 이 공사”(중략)

둘은 이상열의 푸조 외교관차를 타고 리츠 호텔로 향했다.
“이 공사, 별일 없으면 카지노나 가지.”
“그러시죠”

파리의 카지노는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6시에야 문을 닫아 4시간을 쉬다가 오전 10시에 다시 문을 열기 때문에 진짜 도박꾼들은 밤 10시경에 가는 것이 오히려 이른 편이었다. 김형욱은 여장을 풀자마자 그랑타르메가 1번지에 소재한 카지노 ‘르 그랑세르 쿨’로 달려가 바카라 도박을 하는 홀로 들어섰다.

“아이고 제너럴 김, 어서 오십시오.”
김형욱은 자신이 제너럴, 즉 ‘장군’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자주 나타나는 단골에다가 손이 커서 카지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VIP손님이었다. (중략)

김형욱이 파리 카지노에서 며칠째 도박에 빠져 있던 1979년 10월 5일 오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짧은 머리에 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진 30대 후반의 동양인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특수훈련이나 합기도를 연마한 사람처럼 날렵하고 다부졌다.

그의 이름은 조용박, 일본 이름은 구로이 다카기리, 그리고 여권 이름은 김승이었다. 곽성용이라는 동행이 있었다. 


조용박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력을 가진 프로페셔널이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건 몸 풀기 정도에 불과하고 남한과 북한을 제 안집 드나들 듯 왕래하는 사나이였다. 평양에 갈 때는 북파 공작원으로 서울에 들어올 때는 남파 간첩으로 아무런 갈등 없이 칠면조처럼 색깔을 바꾸었으나 잘도 살아남는 불사조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1979년 10월 7일 오후 7시, 김형욱은 지쳐있었다. 카지노 ‘르 그랑 세르클’에 오전 11시 무렵 도착해 점심을 적당히 먹고 꼬박 8시간을 카지노 도박에 매달렸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서 귀엣말을 했다.

“부장 각하, 정지숙(가명)씨가 오셨습니다.”
“응, 그래, 당신 누구야?”“정지숙씨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구먼, 어디 계신가”
“아래 1층 승용차 안에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좋아, 나가지” (중략)

두 대의 검은 승용차가 대기해 있었다. 앞 차는 이상열 소유의 푸조 외교관차, 그리고 뒤는 검은색 캐딜락이었다. 캐딜락을 지나치는 순간 옆에서 수행하던 남자가 오른 팔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억센 힘으로, 그러나 목소리는 아주 은근하게 말했다.

“각하, 저희들이 이 차로 모시겠습니다.”
“아, 이 차”

당시 중정 공작원들은 중정 부장을 ‘각하’라고 불렀기에 김형욱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캐딜락 앞에 서 있던 다른 한 남자도 가세하여 뒷좌석으로 김형욱을 밀어 넣었다. 어투는 공손했으나 밀어 넣는 행동은 거칠었다. (중략) 


신현진은 캐딜락으로 돌아오자 차의 기어를 넣고 쏜살같이 파리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캐딜락이 인적이 없는 시골길에 들어서자 조용박은 김형욱의 목을 그의 겨드랑이 뒤로 나오도록 오른손으로 감싸 안아 목뼈를 꺽었다.
“으드득.....”
김형욱의 몸놀림이 멎었다. 캐딜락은 어둠 속으로 더욱 속력을 냈다. 이상은 조용박의 현장 설명이다. (중략)

이후 조용박은 김형욱의 시신을 닭모이를 만드는 동물사료 분쇄기인 ‘해머밀’에 집어 넣어버렸다고 주장했다.

반면 동행한 신현진은 도로에서 50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이고 땅을 깊이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 있던 낙엽으로 덮여버렸다고 주장했다. 김형욱 회고록5권 혁명과 우상에서>

진실위가 김형욱 실종사건을 발표한 뒤 3년이 지나 시사월간지 <신동아>는 한 경찰관의 인터뷰를 통해 김형욱은 국내로 비밀리에 송환돼 국내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을 보도하였다.

경찰에서 31년간 외사(外事)업무를 담당했던 한 경찰은 <신동아> 2008년 5월호 인터뷰를 통해 오충일 위원장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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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중정부장이 김형욱을 회유하기 위해 자필로 쓴 편지 


<윤모(72) 전 경위는 경찰에서 31년간 외사(外事) 업무에 종사했다. 외사란 외국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대사관, 영사관 등 국내에 상주하는 외국 공관, 상사(商社) 및 단체에 대한 정보 수집, 외신 분석, 국내 거주 외국인 및 해외출입국자 동향 파악 등이 주요 임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수재였던 그는 군 제대 후 1962년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했다. 1963년 4월부터 서울시경찰국(시경) 외사계(정보4계)로 옮겼고 1967년 치안국(치안본부 전신) 외사과로 옮긴 뒤 199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한 번도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된 것은 10·26 직전인 1979년 10월초. 2005년 이 사건을 조사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김형욱은 1979년 10월7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중정의 사주를 받은 외국인 2명에 의해 살해됐다”고 밝혔다

윤씨는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 발표는 소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9년 10월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직후 실종됐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다 내린 뒤 얼마 지나서 얼굴에 검은 자루가 씌워진 사람이 따로 내렸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에 그 사람을 구겨 넣고 사라졌다.”

윤씨는 이 얘기를 김포공항에 나가 있는 외사요원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가 특이동향 보고를 하면서 “김형욱이 들어온 것 같다”고 귀띔했다는 것.

“그날 밤 관련 내용을 정보보고서에 담아 외사관리관에게 결재를 올렸다. 보고서 밑에 ‘열람 후 즉시 파기’라고 적었다. ‘김형욱’이라고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 김형욱이 실종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날 김형욱을 태우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문제의 비행기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여객기였다고 한다. 취리히는 김씨의 예금계좌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윤씨는 “(김형욱을) 마취시킨 후 기내식 창고 같은 곳에 숨겨 데려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재규 아니면 김형욱을 죽일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를 분노케 한 김형욱 회고록이 이미 일본에서 출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형욱 회고록은 국내에서는 출판이 금지됐지만 외사계는 해외 경찰 주재관을 통해 그 책을 입수했다.

내가 가장 먼저 봤다. 중정도 갖고 있었다. 김재규는 그때 이미 박정희 암살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박정희가 죽을 경우 그의 경쟁상대는 김형욱이었다. 중정 출신 인물 중 미국이 가장 맘에 들어 한 사람이 김형욱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회고록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후계구도에 휘말려 살해됐다는 분석이다.

윤씨는 김형욱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온 뒤 김재규가 담당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확인했다. 담당요원은 ‘혼수상태에 빠진 김형욱이 탄 차를 폐차장 압축장치 속에 밀어넣었다’고 보고했다.” 신동아 2008년 5월호에서> 


김형욱의 실종설과 사망설이 언론에 최초 보도되기 시작한 1개월 여 뒤 유족인 신영순은 1979년 11월 18일 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고소장에는 한국의 공권력이 남편인 김형욱을 살해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 등을 살인죄로 고발했다. 이 고소는 그해 12월 기각되고 말았다.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형욱의 실종설과 사망설이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1984년 10월 8일 신영순과 그의 가족들은 관련 당국에 김형욱에 대한 사망신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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