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 카지노는 ‘전두환 정권 아이디어’ - ⑰강원랜드 카지노 탄생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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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랜드 카지노는 ‘전두환 정권 아이디어’ - ⑰강원랜드 카지노 탄생비화

매니저 기자 0 487 0 0

국내 유일 내국인 출입 카지노인 강원랜드는 1995년 탄광촌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통해 극적으로 만들어진 탄광촌 주민들의 피와 땀, 눈물의 집합체다.

그러나 카지노 사업발상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시작된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사실 강원랜드는 1995년 12월 폐광지역지원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뿌리는 1980년 4월 탄광촌 사북에서 폭발한 ‘사북항쟁’이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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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랜드 운암정 인근에 설치된 대통령 오신 우리 마을 기념비. 1980년 10월에 세워졌다 


사북항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국가정책에서 석탄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던 사실을 알아야 이해가 쉽다.

역대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최대 민생현안 정책으로 석탄산업이 자리했다.

국내 무연탄을 생산해 국민연료인 연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야 말로 외화절감은 물론 산림녹화, 서민생활 안정 등 경제개발시대 정권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연탄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탄광촌에서 생산한 무연탄을 수도권에 대량 수송할 수 있는 산업철도의 부설이 시급했다.

1955년 12월 30일 경북 영주~강원 삼척군 철암을 연결하는 영암선 철도 개통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영하 20도가 넘는 엄동설한에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광부들을 위로 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매년 연말이면 모범광부를 선발한 뒤 대통령 관저인 이화장으로 초청해 직접 표창하며 격려하였다.

이어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의장도 탄광촌을 가장 먼저 방문해, 광부들을 위로하고 산업전사로 특별 대우하도록 지원토록 했다.

1980년 4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립을 앞둔 '신군부 실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집권을 준비하다가 탄광촌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다.

1980년 4월 21일 전국을 뒤흔든 소요사건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첩첩산중의 탄광촌 사북에서 일어난 ‘사북항쟁’은 대단한 충격파를 던졌다.

4000여 명의 광부들이 근무하는 전국 최대 민영탄광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당시 노노갈등과 비민주적인 노무관리로 현장 광부와 그 가족들은 막장과 사택에서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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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24일자 사북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사회면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촌은 마치 집단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1가구당 주거면적은 5,6평 정도로 방2개 부엌 1칸이 딸려 있다. 화장실은 30~40세대씩이 불결한 재래식 공동변소를 사용해야 하고, 수도 또한 공동 수도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생활에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시간제 급수 때문이었다. 사택은 각 세대마다 시멘트 벽돌로 나뉘어 있고, 천장은 칸막이도 없이 얇은 합판으로 이어져 방음이 전혀 안 되고 있다.

때문에 야간작업을 마치고 낮에 쉬어야 하는 광부들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지부장 선거에 부정시비가 휘둘렸고 막장의 분노가 폭발하며 사북항쟁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황인오 ‘사북사태 진상보고서’에서>

당시 사북사건은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발생되었기 때문에 언론통제로 21일부터 23일까지 신문과 방송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다.

신군부에 의해 계엄군에 하달된 보도지침에 따라 24일자 언론은 일제히 '광부들의 난동', '무법천지', '검은 비극'등의 제목처럼 광부들을 폭도로 몰았다. 해외 언론에도 이런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언론에 사북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인 신민당은 진상파악을 위해 박용만 의원을 단장으로 이택희, 엄영달, 김명윤 등 8명의 현역 의원을 조사단으로 현지에 파견하여 광부들의 의견을 들었다.

광부들은 신민당과 공화당의 진상조사단이 다년간 뒤 처우개선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보복이었다.

주모자 처벌을 하지 않겠다던 약속은 사태수습 불과 12일이 지나 뒤집혔다. 당시 15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이 야간에 계엄군의 군화 발에 의해 사전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돼 잠을 재우지 않고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일부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나머지는 평생을 후유증에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북사건 주모자로 경찰과 계엄사합동수사본부에 검거된 광부 가운데 이원갑과 신경 등 28명이 구속됐다. 이 사건은 20여일 후에 발생된 광주항쟁 때문에 묻혀 졌지만 광부들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1980년 4월 사북항쟁(속칭 사북사태)이 발생해 전국을 뒤흔들 게 되자 정권창출을 앞두고 있는 국보위 핵심 당사자들에게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일대 사건으로 각인됐다.

사북항쟁 직후 전국 학원가와 노동계의 연쇄적인 분규와 소요가 촉발된 분위기에서 발생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사북항쟁이 도화선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정권 창출을 앞둔 국보위 핵심 관계자와 고위 공직자들은 사북(탄광촌)이라는 곳에서 민심이반이 나타나면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전국에 확산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집권초기인 1980년 10월 5일 헬기를 타고 사북광업소를 극비리에 방문했고 사북광업소 채탄막장에 입갱했다. 육사 11기 출신의 전두환 대통령은 사북사건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탄광막장을 견학한 것이다.

또 사북광업소는 정권의 지시로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하는 날, 광부 체육대회를 열도록 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사북방문은 사북사태의 파장에 정권이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집권 후 "국민연료의 효율적 개발을 위한 묘책 강구“와 ”일본과 독일의 예를 보면 머지않아 석탄산업은 사양화 될 것이기에 폐광 대안사업을 제시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탄광의 급격한 폐광으로 주민들이 '제2의 사북사태'를 일으키기 전에 대안사업을 준비할 필요성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시 산자부는 무연탄의 안정적 개발과 공급을 위해 ‘탄광도시’를 개청하기로 하고 대상지역으로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쳐 태백시로 개청하는 방안을 보고했다. 태백시 명칭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삼척군 황지읍에 자리한 태백산에서 ‘차용’하기로 했다.

당시 장성읍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장성광업소가 있었으며 6000여 명의 광부들이 연간 220만 톤의 무연탄을 생산하였다. 또 인근에 대규모 탄광으로 인정받는 강원탄광을 비롯한 10여개 탄광이 있었다.

또 황지읍에는 국내 굴지의 민영탄광인 함태탄광을 비롯해 한성광업소, 황지광업소 등 30여 개의 탄광이 소재했다. 이들 두 읍의 광부 숫자가 2만 명을 헤아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10월 사북을 방문한 이듬해 1981년 3월 삼척군 장성읍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를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방문하여 광부들을 격려했다.

이어 정부는 1981년 7월 1일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쳐 ‘광도’ 태백시로 개청하면서 대대적인 개청식을 갖도록 했다.

김광식 전 강원랜드 사장은 과거 산업자원부 석탄산업과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전두환 정권의 탄광촌 정비사업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김광식 전 사장의 회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가장 어려운 곳부터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탄광촌 정비사업을 추진했다. 대통령 특별지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산업부는 물론 내무부, 건설부, 문교부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나서서 도로망 확충, 상수도 개통, 사택과 목욕탕 시설, 우수교사 탄광촌 배치 등을 실시했다. 당시 탄광촌에 근무하는 교사들에게 가점을 주도록 하는 방안이 당시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업은 국무총리실에서 꼼꼼하게 챙겼다.”

전두환 대통령은 또 1982년 9월 4일 태백시 한성광업소에서 출수사고 14일 만에 배대창씨 등 광부 4명이 기적처럼 생환하자 “여러분의 끈질긴 사투와 극적인 생환을 온 국민과 함께 위로한다”는 위로전문(축전)을 보낼 정도로 광부들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일들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탄광촌과 광부에 대한 관심의 척도를 나타내는 사례의 일부였다.

특히 산자부는 폐광의 대안을 찾기 위해 학자들과의 연구를 거쳐 미국에서 1930년 대공항 당시 추진한 라스베이거스의 사례를 들어 내국인 출입 카지노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안했다.

조선대 자원공학과를 나와 산자부 광무국에서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하다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이사장을 거쳐 강원랜드 2대 사장을 지낸 김광식 전 사장의 회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81년 삼척시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쳐 광도 태백시를 출범시킨 군사정부는 폐광이후 탄광촌의 대안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당시 산자부에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산자부는 여러 방안을 놓고 고민하다가 전문가들의 자문과 협의를 거쳐 나온 것이 내국인 출입 카지노 리조트였다. 외국의 사례도 연구하고 최적의 대안으로 카지노가 유일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권에서 추진의지가 없었고 탄광지역에서도 별다른 기미가 없이 잠잠해진 때문에 카지노는 아예 묻혀 버렸다. 그러다가 1995년 '사북 3.3 사태'로 10여 년 만에 카지노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특히 카지노 대안이 거론될 1982년 당시 산업부는 카지노 핵심시설 후보지로 태백지역을 검토했다. 김광식 전 사장의 회고. 

"1980년대 초반 카지노가 처음 거론될 당시 여러 곳을 검토했었다. 그러나 고한 사북은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고 유일하게 태백지역을 적지로 판단했다.

우선 대한석탄공사 문곡훈련원과 문곡동 풀장 일대 부지 및 종합운동장 앞 태백산 줄기 수백만평은 카지노리조트로 최적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이곳은 대부분 국유지인데다 민가에서도 멀리 떨어져 민원이 제기될 이유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2순위로는 소도지역 함태탄광 일대 등이 유력 후보지로 꼽혔다.

당시 카지노 입지를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나중에 흐지부지 됐다. 당시 윗선의 지시로 카지노를 대안으로 검토하고 후보지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태백 대신 사북지역에 카지노가 들어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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