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탈북자 ‘카지노의 바다’에 빠지다 - ⑱북한군 3개 군단을 먹여 살린 탈북자 ‘카지노 타짜’
토지노이야기

엘리트 탈북자 ‘카지노의 바다’에 빠지다 - ⑱북한군 3개 군단을 먹여 살린 탈북자 ‘카지노 타짜’

매니저 기자 0 484 0 0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1월 기준으로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수는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남한에 연고가 전혀 없는 탈북자들이 남한 땅에서 성공적인 정착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탈북여성들은 남한 남성과의 결혼을 가장 빠르고 안정적인 정착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탈북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78%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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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카지노의 빅휠 게임 


지난 2006년부터 탈북여성들과의 인연을 연결해 주는 결혼정보센터 ‘남남북녀’를 운영해온 홍승우 이사는 “탈북여성들은 아무리 엘리트 출신이라도 원하는 직장의 취업이 쉽지 않고 안정적인 생활도 어렵다”며 “선배 탈북여성들이 권하는 남한생활의 조기 정착은 결혼이고, 실제가 그렇다”고 설명했다.

그는 탈북여성 가운데 1,200여 명에 달하는 미혼여성 회원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갖춘 남한 남성과의 성공적인 만남을 성사시켜 주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재까지 550여 명의 탈북여성을 혼인까지 성공시켜 주었다.

지난 2007년 탈북한 이주영(52.가명)씨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북한 유일의 원산 경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북한군 3개 군단의 생계를 10년간 책임져온 탁월한 경영능력을 갖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이다.

그런 그였지만 가까운 친척이 악질 반동분자(간첩)로 몰리는 바람에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넘어 탈출을 해야만 했다.

남한의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그는 강원랜드에 스키를 타러 왔다가 카지노의 매력에 빠지면서 부인과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북한에서 40년간 카지노를 구경하지 못했는데 강원랜드 카지노를 보고 멋진 오락게임에 반했다. 몇 십만 원으로 몇 백만 원을 따고 잃는 경험을 통해 카지노에서 쉽게 돈을 벌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카지노에 몰두 하였다.”

그러나 규제가 심한 강원랜드의 베팅 시스템으로는 카지노를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마카오로 장소를 옮겼다.

‘카지노의 타짜’가 되기 위한 나름의 독특한 베팅 시스템 연구를 한 결과, 그는 완성 단계에 올랐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현재 그는 마카오에 거주한다.

이씨가 전한 파란만장한 삶의 일부를 옮겨 본다.

“일본에서 부부가 된 부모는 1960년 12월 제69차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정착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너무 심해 남한보다 살기 좋다는 북한으로 이주한 것이다.

일본에서 가져간 재산도 있던 부모 덕분에 북한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 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원산경제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생전 처음으로 철학과 심리학을 배우고 경제학도 체계적으로 배웠다.

유럽의 산업혁명은 물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학에 경제논리, 경제활동 등에 대해 세심하게 공부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경제학 공부는 그래도 편향되지 않게 진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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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주항 


경제학도인 그는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장기를 배우기 위해 북한 최고의 장기고수를 찾아 나섰다.

장기와 화투 게임 등 잡기에 워낙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장기실력을 최고로 키우기 위해 물어물어 북한 최고의 장기고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3개월 동안 열심히 지도를 받은 뒤 장기고수로 부터 “더 이상 가르쳐 줄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고수의 곁을 떠난다.

자신의 장기실력을 테스트하고 싶은 생각이 들은 그는, 도시지역을 찾아다니며 길거리에서 박포장기로 돈을 걸고는 장기 실력자들과 판을 벌여 나갔다.

“내가 낸 박포장기를 풀면 100만 원을 주겠다.”
3만 원을 걸고 내기에 나선 장기 실력자들은 번번이 장기 알을 던졌고 그는 3개월간 박포장기로 한 달에 수백만 원(한화 기준) 이상을 벌어들이는 장기 고수의 수준에 올랐던 것이다.

이윽고 6개월간의 ‘장기 수련’을 마친 뒤 그는 원산경제대학을 찾아갔으나 대학의 학과장은 사전에 양해도 없이 장기간 학교를 다니지 않은 문제 학생은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도교수와 학과장에게 사전에 학교를 못 나온다는 설명도 없이 6개월이나 학교를 나오지 않다가 졸업장을 받을 때서야 학교에 나온 염치없는 사람을 학생으로 받을 수는 없다.”

대학졸업장이 꼭 필요한 입장이었던 그는 학과장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제가 사실은 북한 최고의 장기고수를 찾아가 장기에 대한 수업을 받느라 6개월 간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 장기도 경제학의 한 분야라고 생각해서 그러니 한 번만 봐 달라.”

다행히 장기의 고수였던 학과장은 이씨가 북한 최고의 장기고수에게 장기 수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한 제안을 하였다.

“좋다. 만약 학생이 나와 장기를 둬서 이긴다면 졸업을 인정해 주겠지만, 학생이 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학교를 떠나라.”

이렇게 되어 시작된 ‘졸업장’을 건 장기 시합은 3전3패를 하면서 학과장이 이씨의 장기 실력을 높이 인정하여 졸업장을 주기로 한 것이다. 


“나를 이긴 사람은 학생이 처음이다. 뛰어난 장기실력을 높게 인정하여 학교를 마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북한 경제대학에서 4년간 이론교육을 배운 이씨는 2년 후 평양 트랙터를 만드는 북한 굴지의 공장에 현장실습을 들어갔다.

금성 뜨락뜨락 공장의 실습생으로 근무하게 된 이씨는 직영공장의 종업원 수가 무려 1만 7,000명에 달하는 거대한 공장으로 이곳에서 현장경제를 배우게 되었다.

당시 북한 최대의 트랙터 공장인 금성 뜨락뜨락공장은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4만 3,000명 규모에 달하는 대규모 공장이다.

러시아에서 들여온 기술과 생산라인으로 만든 트랙터는 북한 전역의 농장에 공급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현장실습을 하던 금성 뜨락뜨락 공장에서 말단 관리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1996년 북한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 되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나라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정일은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노동청년>의 북한 3대 신문의 1996년 신년사를 통해 ‘고난의 행군’을 강요 하였다. 신년사를 통해 김정일은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 인민들은 사회주의 3대진지를 튼튼히 다지며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북한은 1994년부터 국제적인 고립으로 인한 경제난과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기 위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핵심이 ‘고난의 행군’이었다.

어느 날 북한군 수도방위사령부 부사령관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가 군단사령부 간부와 함께 이씨를 찾아왔다.

“이 동지! 오랜만이오. 이 분은 군단 참모장인데 참모장의 설명을 듣고 우리를 도와주시오. 지금 상황이 급한데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정이라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지만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좋소, 동지, 그런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될지 모르겠는데 무엇을 어떻게 도와달라는 것인지 말해 보시라우.”

참모장이 설명했다. 


“지금 나라사정이 매우 어려워 나라에서 실탄과 무기를 제외하고는 식량과 모든 부대의 운영자금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통보가 와서 비상이라오. 우리 3개 군단은 이 때문에 비상이오. 군단에서 머리를 써 봤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아이디어가 전혀 없어 경제전문가인 동무를 찾아 온 것이니 거절하지 말고 도와주시오!”

황당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참모장에게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부대에서는 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어떤 지원을 할 생각 입니까?”

“인민군 2개 소대 병력과 자가용 및 15톤 화물트럭 2대에 버스는 물론 당신이 원하는 군인 계급과 군복, 신분증을 만들어 주고 당신 월급은 당신이 버는 돈에서 챙겨 가면 된다.”

생각하던 이씨는 조건을 추가로 제시 하였다.

“좋습니다. 그러나 사업을 하려면 창고와 사무실이 필요한데 별도의 경제부대 형식으로 만들어 주시오.”

“감사하오. 이 동무!”

이씨가 3개 군단에 대한 경제활동을 하겠다고 답변하자 친구와 군단장 참모가 이씨를 얼싸 안으며 고마워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날 군단사령부 주변의 공터에 울타리를 세우고는 허름한 건물을 리모델링한 후 정문에는 기관총 진지까지 세우고 군부대와 흡사한 형식의 경제부대를 만드는 작업이 1개월 보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렇게 이씨는 3개 군단(북한의 1개 군단은 4개 여단으로 편성)의 병력 3만여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막강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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