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마지막 ’조폭 장(葬)‘…강원랜드 VIP ’꽁지‘ - ㉘강원랜드 VIP룸의 전설들
아이러니 하게도 동대문파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동대문파’의 핵심 멤버였던 박종식은 불과 50세의 한창 나이에 마카오의 ‘동대문 식당’에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2006년 11월 3일 마카오의 동대문식당에서 시동생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시동생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형수는 그 당시의 일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A씨의 회고담.
▲2007년 11월 3일 마카오 동대문식당에서 발생한 피살사건 현장검증
“평소처럼 사북 아파트에서 쉬고 있는데 시동생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수, 종식이가 죽었다는데 알고 있느냐?’는 그 말을 듣고는 황당해서 내가 ‘무슨 소리야, 내가 오늘 이른 아침에 마카오 간다고 해서 가방을 싸줬는데. . .’하며 정색을 했다.
그러나 시동생 친구는 ‘형수, 지금 뉴스에 나오는데 얼른 TV 틀어 봐요. 종식이가 마카오서 칼 맞아 죽었다는데’하는 것이었다. 즉시 YTN을 틀자 뉴스 속보에 시동생 이름과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자막과 함께 나오는 것이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고, 황당했다. ‘아니, TV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내가 여행가방을 싸서 줬는데...”
한숨을 돌린 그는 당시 상황을 다시 회고했다.
“새벽에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집에 온 시동생은 마카오에 가야 한다며 여행 캐리어에 짐을 싸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아니, 마카오를 가려면 술이나 깬 다음에 가면되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새벽처럼 그러냐’고 말했다. 그러자 시동생은 ‘친구 차타고 공항에 가면 술이 깰거고 오늘 인천공항서 8시 반 에어마카오 타고 가야해요 형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짐을 싸 보낸 지 하루도 지나질 않아 시동생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으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짐을 싸주지 말았을 것을’ 하는 후회도 들고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형이 마카오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동생 종혁은 슬픔을 곱십으며 동대문파 조직원들을 급히 수배하였다.
15명의 조직원을 선발한 종혁은 남은 조직원들에게 장례절차를 준비시키고 전국의 조폭 두목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는 20대와 30대의 젊은 조직원 15명을 데리고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이동해 오전 8시30분 인천 발 에어마카오에 탑승하였다.
마카오에서 이건주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물론, 형의 시신을 수습해 인천공항으로 오기로 각오를 하였다.
또한 장례식장은 동대문에서 가까운 동부시립병원 장례식장으로 정하고 전국의 조직에게 연락을 취하는 한편, 정례일정 등을 협의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르도록 준비를 시켰다.
마카오에 도착한 종혁 일행은 마카오 경찰서에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서측은 시신만 확인시킨 후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부검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당시 마카오 경찰에는 홍콩에 있는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경찰 영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마카오 경찰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무척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치안이 완벽하다고 소문난 마카오 시내의 중심가에서 한국인들이 살인을 자행한 사건으로 알려진 탓에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대문식당의 여자 사장은 “이번 살인사건 때문에 한국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무척 나빠져 걱정”이라며 “더군다나 우리 식당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토로했다.
부부가 운영하는 동대문식당은 강원랜드가 개장하던 2000년에 문을 열었고, 식당 외에도 여행사 업무, 골프장 안내, 마카오에 대한 종합정보를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곳은 마카오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과 카지노 고객들, 마카오에 사는 현지 한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마카오의 대표적인 한인 식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동대문 식당 대신 ‘신 동대문식당’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주인도 바뀌었다.
마카오 경찰의 부검결과 종식의 사인은 과다출혈로 밝혀졌다.
이건주를 찾아서 복수를 하려던 종혁 일행은 빈손으로 저녁이면 동대문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마카오 도착 5일 만에 시신을 인수 받은 후, 9일 새벽 1시 마카오발 인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종식의 시신이 안치된 동대문 동부시립병원 장례식장은 전국의 유명한 주먹은 물론 주먹깨나 썼다는 건달들이 매일처럼 모여들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주먹들이 장례식장 입구부터 문상을 하는 식장까지 150미터에 걸쳐 2줄로 300여 명이나 도열해 문상객들을 맞았다.
당시 장례식장에는 매일 수천 명 이상의 주먹들이 운집해 문상객을 맞았고 일본의 야쿠자 조직원 수백 명도 찾아와 문상을 하였다.
전국에서 유명 주먹들이 다 집합하자 당연히 경찰에도 비상이 걸려 장례식장 인근에서 수백 명 이상의 경찰병력이 은밀하게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동부시립병원 장례식장을 다녀온 주먹계의 원로인 K씨의 회고.
“2006년 11월 서울 동부시립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박종식의 장례는 대만 조폭의 대부 장례식을 연상할 만큼 성대한 예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종식 보다 7년 늦게 지난 2013년 1월 5일 치러진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장례식도 성대하다고는 했지만 첫날에만 500여 명이 문상을 왔으나 이튿날부터는 한산한 모습에 그치는 등 박종식의 장례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세계 3대 폭력 조직으로 이탈리아 마피아를 중심으로 중국 삼합회와 일본 야쿠자를 꼽는다.
지난 2005년 5월 29일 ‘대만 조폭의 대부’로 불려온 쉬하이칭(93)의 장례식은 조폭 세계 장례식의 상징으로 알려질 정도로 전설처럼 회자된다.
당시 쉬하이칭의 장례식에는 대만은 물론 홍콩, 일본의 조직폭력배 1만 여명이 검정색 양복을 차려입고 집결할 만큼 대단한 위세를 보였다.
대만 타이베이 도심에서 펼쳐진 장례식은 흰색 영구차와 50명으로 구성된 악단을 앞세우며 무려 10킬로미터에 걸쳐 가두행진을 진행할 정도였다.
반세기동안 대만 조폭계의 대부로 군림한 쉬하이칭은 158센티미터의 단신에 몸무게는 35킬로그램에 불과했지만 대만 주먹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했던 인물이다.
1913년 대만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10대 초반에 주먹계에 발을 담갔다. 주먹솜씨와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으로 일찌감치 보스자리를 꿰찼다.
그는 조폭두목이 된 이후 호텔, 나이트클럽, 농산물 수출업체 등 수십 개의 사업체를 거느릴 정도로 재계의 실력자로도 부상하였다.
1950년대 그는 홍콩 삼합회의 하나인 ‘14K’의 1인자가 됐고 이때부터는 마카오에서도 도박장과 술집을 운영하며 연예계에도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고 한다.
덩치가 워낙 적어 그의 별명은 ‘모기 형님’으로 불려졌다. 조폭세계에서 각 파벌들이 분쟁이 발생하면 ‘위대한 중재라’라는 표현에 걸맞게 상대방 조폭조차 존경을 표할 정도로 뛰어난 분쟁해결 솜씨를 보였다.
대만은 물론 홍콩과 마카오, 일본에서도 그의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치러져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마카오에서 시신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시동생의 장례식장이 있는 동부시립병원 장례식장에 택시를 타고 도착하였다.
택시에서 내리니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정 양복을 입은 젊은 청년들 수백명이 장례식장 입구부터 시동생의 위패를 모신 식장까지 양쪽으로 도열해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이런 장례식장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보니 전국의 유명 조폭들이 다 참석한 거 같았다. 심지어 일본의 야쿠자 조직들도 상당수가 조문을 왔다.
전국에서 주먹깨나 쓰고 하는 사람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 참석한 것으로 기억한다. 조폭들의 장례식이 얼마나 화려하고 성대하게 진행되는 지, 시동생의 장례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하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는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시동생의 머리는 매우 비상하였다. 시동생이 죽고 집안정리를 하다가 서재에서 두꺼운 책을 넘기는데 책장 하단에 펜으로 쓴 표시가 눈에 띄었다.
이름과 금액이 표기된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시동생이 꽁지를 하면서 고객에게 빌려준 돈을 장부에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소설책의 페이지가 표기된 옆에 날짜와 금액, 돈을 빌려간 고객의 이름을 기록했던 것이다.
불법 사채를 하면 경찰이 장부를 압수하는데 시동생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사채장부 대신 소설책을 이용해 기록을 남기는 기발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만큼 머리가 비상했었다.
전 재산을 날리고 다시 꽁지를 시작할 때도 머리를 썼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서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VIP룸의 직원들에게 월급을 준다 생각하고 매월 3000~5000만 원을 지출했다.
고객의 신용상태도 직원들로부터 정보를 받아 꽁지 돈을 빌려줘야 할지 주면 최대 얼마까지 주어야 할지도 파악하였다. 사북 전당포업계에서도 다른 꽁지 돈은 떼어 먹을 수 있어도 종식이 돈은 절대 떼어 먹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동대문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가 강원랜드 VIP룸에서 500억 원을 벌어 ‘꽁지’전설을 만든 뒤 마카오에서 비명횡사한 박종식은 2006년 11월 16일 경기도 양평의 한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박종식이 마카오에서 비명횡사한 뒤 남은 형제와 가족들은 멘붕에 빠졌다.
강원랜드 VIP룸을 장악했던 종식이 사라지자 강원랜드 직원들도 그의 형과 형수 및 동생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돈을 빌려간 고객들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먼저 동생 종혁은 이듬해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품의 위반 등으로 영구 출입정지를 당한 뒤에는 강원랜드를 떠났다.
이어 동대문파의 보스였던 종식의 형도 동생이 죽고 난 뒤에는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경기도 강화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을 하다가는 2009년 12월 초 사망하였다.
동대문파의 보스인 박종팔(가명)이 사망하자 동대문파 조직원들이 가족들에게 ‘조폭장’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제안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조출하게 장례를 치르고 말았다.
“남편이 죽자 소식을 전해들은 동대문파 조직원들이 동생처럼 조폭장으로 성대하게 치르자고 하였다. 동대문판의 보스이면서 마지막 남은 낭만파 주먹이 운명했는데 조폭장으로 치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여동생이 적극 반대하면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